배론성지를 찾아서 ②

– 황사영 백서 토굴, 절박한 신앙과 역사의 질문

안녕하세요, 티파니입니다. 지난 배론성지를 찾아서 ①에서는 성지의 역사와 배 모양의 기념성당을 함께 둘러보았습니다. 오늘은 제천 배론성지 황사영 백서 토굴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려 합니다.

성지 안쪽, 옹기들이 놓인 길을 지나 낮은 토굴 앞에 섰습니다. 어둡고 비좁은 공간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집니다. 지금은 누구나 걸어 들어올 수 있는 이곳이, 한때는 자신의 이름조차 감추어야 했던 청년의 은신처였습니다.

배론성지의 옹기 가마 재현 공간과 황사영 토굴 방향 표지
옹기 가마 재현 공간과 토굴 안내 표지. 옹기를 굽던 삶터의 흔적을 따라 황사영의 은신처로 향합니다.

1801년 신유박해 속에서 황사영 알렉시오는 이 골짜기에 숨어 지내며 비단에 편지를 썼습니다. 교회를 살리고 싶다는 간절한 호소였지만, 외국 군사력의 개입을 요청한 내용은 당시 조정에 중대한 역모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토굴 앞에서 저는 한 사람의 믿음을 쉽게 칭송하거나 단죄하기보다, 그가 처했던 두려움과 그 선택이 남긴 질문을 함께 마주하고 싶어집니다. 오늘의 순례는 그 어려운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걸음입니다.

젊은 선비 황사영, 신유박해를 피해 배론에 숨다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는 1790년 어린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한 인물입니다.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딸 정명련, 곧 정난주 마리아와 혼인한 뒤 친척들을 통해 천주교를 접했습니다.

그는 교리를 공부하고 신심 서적을 필사했으며, 교우 자녀들에게 신앙을 가르쳤습니다. 조선에 들어온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도우며 활동하던 평신도 지도자이기도 했습니다.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났습니다. 황사영에게도 체포령이 내려졌고, 그는 김한빈 베드로와 함께 배론으로 피신해 김귀동의 집에 마련된 토굴에 몸을 숨겼습니다. 오늘 성지에서 만나는 토굴은 그 은신과 집필의 시간을 기억하도록 재현한 공간입니다. [1]

배론성지 황사영 토굴의 낮은 돌 입구와 옹기 항아리
황사영 토굴의 낮은 입구. 돌문 앞에서 박해를 피해 몸을 숨겨야 했던 시간을 떠올립니다.

옹기를 굽던 가마와 사람이 숨었던 토굴은 구분해서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사진 속 가마 옆의 표지는 토굴로 향하는 길을 가리킵니다. 교우들의 생계였던 옹기와 숨어 지켜야 했던 믿음이 가까이 놓여 있어, 이곳에서는 생활과 신앙이 얼마나 절실하게 이어져 있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었고, 누군가에게는 몸을 숨길 작은 공간만 남아 있었습니다. 낮은 입구를 바라보니, 무사히 하루가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을 그때의 시간이 마음에 오래 머뭅니다.

작은 비단에 남긴 1만 3천여 자, 황사영 백서

‘백서(帛書)’는 비단에 쓴 글이라는 뜻입니다. 황사영은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 교회의 사정을 전하기 위해 약 62×38cm 크기의 흰 비단에 1만 3천여 자를 써 내려갔습니다. 비단은 옷 안에 꿰매어 감추기 위한 재료이기도 했습니다.

편지에는 박해의 경과와 신자들의 행적, 주문모 신부의 죽음, 무너진 교회를 다시 일으키려는 방안이 담겨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백서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을 살피는 중요한 사료로 읽힙니다. [2]

편지는 1801년 10월 29일 완성되었습니다. 황심 토마스와 옥천희 요한 등을 거쳐 북경에 전하려던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황사영은 그해 11월 5일 배론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백서도 함께 압수되었습니다. [1]

손바닥보다 훨씬 넓은 비단 한 장이라 해도, 그 안에 한 시대의 고통을 담기에는 얼마나 작았을까요. 빼곡한 글씨를 생각하면 한 줄이라도 더 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저라면 무엇부터 적었을지, 끝내 보내지 못할지도 모르는 편지 앞에서 어떤 기도를 했을지 조용히 헤아려 봅니다.

신앙의 자유를 바란 편지에 왜 대역죄가 적용되었을까

백서가 논쟁적인 이유는 박해를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외부의 힘으로 조선 조정을 움직이려는 방안을 담았기 때문입니다. 재정 지원과 북경 교회와의 연락뿐 아니라, 청 황제의 개입과 청의 감독 아래 조선을 두는 구상, 서양 군함과 병력을 통한 압박까지 제시했습니다.

조선 조정은 이를 국가 질서와 통치권을 위협하는 내용으로 보았습니다. 황사영은 대역부도 판결을 받았고, 1801년 12월 10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사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백서 사건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명분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1] [3]

다만 신유박해는 백서가 발견되기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박해의 원인을 이 편지에 돌리거나, 이후의 쇄국정책 전체가 한 사건 때문에 생겼다고 단정해서는 그 시대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빼앗는 박해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외국 군사력에 기대는 선택이 나라와 백성에게 가져올 위험도 가볍게 넘길 수 없습니다. 신앙을 지키려는 목적과 그것을 이루려던 방법을 함께 성찰하는 일이 이 기록을 읽는 데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저 역시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을 때면 마음이 급해집니다. 그러나 간절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방법이 옳아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 시대의 두려움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으면서도, 믿음이 다른 이의 삶과 평화까지 살피는 길이어야 함을 토굴 앞에서 다시 배웁니다.

황사영 백서 원본과 오늘 우리가 기억할 신앙

압수된 백서는 의금부에 보관되다가 1894년 문서 정리 과정에서 발견되어 뮈텔 주교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후 1925년 로마로 보내졌으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자료는 원본의 소장처를 교황청 민속박물관으로 소개합니다. 뮈텔 주교는 원본을 보내기 전에 실물 크기의 동판 사본을 제작해 인쇄·배포했습니다. [2]

원본이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교황청이 백서에 담긴 모든 정치적 방안을 승인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와 그 안에 제시된 방안에 대한 평가는 구분해서 살펴야 하겠습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황사영을 시복 추진 대상인 ‘하느님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이는 이미 복자나 성인으로 선포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4] 그의 신앙을 기억하면서도 백서가 남긴 논쟁을 함께 읽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흰 비단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위의 기록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 듯합니다. 나는 무엇을 믿고, 그 믿음을 어떤 모습으로 살아 내고 있는가. 오래된 편지가 오늘의 제 마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티파니의 묵상: 간절함에 평화의 지혜를 더하게 하소서

배론성지 황사영 토굴 재현 공간 안의 작은 십자가와 낮은 책상
현재 토굴 재현 공간의 내부. 벽의 작은 십자가와 낮은 책상이 침묵 속 묵상을 이끕니다.

어두운 토굴 앞에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안쪽 벽에 걸린 작은 십자가와 낮은 책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늘의 전시 공간만으로 당시의 삶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몸을 낮추어야 들어설 수 있는 이 자리에서는 마음도 자연스레 낮아집니다.

비단 조각에 글을 적던 그는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까요. 그 마음을 제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무너지는 교회를 바라보며 도움을 구하려 했던 절박함 앞에서는 가슴이 아려옵니다. 그리고 그 간절한 선택이 다른 이들에게 미칠 무게까지 헤아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생각합니다.

주님, 저는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가치를 잊고 살지는 않는지요. 남들의 평가에만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단단한 마음을 주소서. 제가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킬 때에도 이웃의 생명과 평화를 살피게 하시고, 간절한 마음에 지혜와 사랑을 더해 주소서.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마당으로 나옵니다. 조금 전까지 서늘했던 마음에 바람이 부드럽게 닿습니다. 자유롭게 기도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안부를 전하며, 두려움 없이 내일을 준비할 수 있다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은총인지 새삼 느낍니다.

삶이 어둡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 저는 이 토굴을 떠올릴 것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믿음을 기억하고, 그 믿음을 오늘의 평화와 사랑으로 살아 낼 길을 주님께 묻고 싶습니다.

제천 배론성지 황사영 토굴 순례 정보

주소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
위치배론성지 경내 황사영 토굴 재현 공간
문의043-651-4527
함께 살펴볼 곳옹기 가마 재현 공간, 최양업 신부 묘소, 성요셉 신학당 복원 공간,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
관람할 때옹기 가마와 은신 토굴을 구분하고, 실내 전시물은 현장 설명을 참고해 살펴보세요.
방문 전 확인미사 시간과 전시·기도 공간 개방 여부는 성지 공식 안내 또는 전화로 확인해 주세요.

현재 배론에서 보는 토굴은 역사적 은신처를 기억하는 재현 공간입니다. 내부의 책상과 전시물을 황사영이 실제 사용한 유품으로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백서 원본과 현장의 복제·전시 자료 역시 구분해서 관람해 주세요.

티파니의 성지순례 일기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이 마음에 작은 묵상으로 남았다면 여러분의 순례 이야기도 댓글로 나누어 주세요. 찬미 예수님!

참고 자료

“배론성지를 찾아서 ②”에 대한 2개의 생각

  1. 핑백: 배론성지를 찾아서 ③ - 티파니의 성지순례

  2. 핑백: 배론성지를 찾아서 ⑤ - 티파니의 성지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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